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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v 님의 얇지만 긴 고민거리.
이 시대의 진정한 창작은? 본문
고요하고 차분한 늦은 밤, 갑자기 든 생각 때문에 마음이 시끄러워진다. 자정이 넘은 시간, 나는 평소처럼 거실 탁자에 앉아 있었다. 다 마시고 바닥에 몇방을 남아 말라버린 에스프레소 잔과, 노트북 메모장이 열려져 있다. 꼬인 실타래 처럼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다. 한 순간에 정리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AI에게 물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몇 초 만에 나온 답변들은 마치 내 마음속을 꽤뚫고 있는 듯 깔끔하게 정리했다.
어제 오후, 새로운 건축 디자인 AI 프로그램 데모 영상을 봤다. 매스 형태에 따라 AI가 건물 외벽 디자인(Facade)을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는 장면이었다. 놀라운 기술이었는데, 갑자기 눈에 익은 패턴이 보였다. '어? 저건 내가 설계했던...' 영상을 다시 돌려보니 확실했다. 수년 전 내가 디자인한 입면 패턴과 거의 똑같았다. 수십개의 대안 중 선정된 디자인이었다. 그런데 AI는 그와 거의 같은 결과를 몇 초 만에 만들어냈다. 단순히 모양이 비슷한 게 아니라, 빛과 기능에 대한 컨셉까지 같았다. 건축물의 디자인은 매우 복합적이라 그것이 단순 표절이라고 말할 순 없으나, 저 입면 디자인을 누군가 사용한다면 그는 스스로 그것이 창작이라고 생각할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며칠 전 어느 블로그에서 누군가 쓴 글을 읽었다. 첫 도입부가 마치 한강 작가의 문체같다고 느꼈다. 최근에 읽은 책이라 확실히 그렇게 느낀것 갔다. 아마도 나 같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 그 블로그의 글을 쓴 사람이 AI에다가 "한강 작가처럼~" 이라고 해서 문구를 다듬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창작은 정녕 그의 것일까? 최근 많은 창작자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특히 음악가와 영상 제작자들은 AI로 인한 수익 감소를 걱정하고 있다. 우리가 밤새워 만든 작품이 몇 초 만에 대체될 수 있는 세상에서, 창작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잡해진 시대이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 더 이상 나만의 일이 아닌 시대. 너무 많은 이미지와 문장이 동시에 만들어지고, 어떤 것이 먼저인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호해진다.
내가 AI 도움을 받아 쓴 글의 저작권은 누구 것일까? 법적으로는 나에게 있다고 한다. 인간의 창의적 판단이 들어갔다면 저작권이 인정된다고. 하지만 AI가 제시한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도 창의적 판단일까?
더 복잡한 건 내 작품이 다른 AI의 학습 데이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고민해서 만든 문장들이 어딘가 서버에서 데이터로 변환되어 수많은 다른 문장들과 섞인다. 그렇게 학습된 AI는 내 문체를, 내 감정을, 내 표현 방식을 흉내낼 수 있게 된다. 이게 저작권 침해일까, 아니면 단순한 학습일까?
그 건축 패턴을 다시 생각해보니 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패턴을 처음 만들 때도 수많은 건축 사례를 참고했었다. 루이스 칸의 빛 처리,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질감, 헤르조그의 기하학적 패턴들. 그 모든 것이 내 머리에서 섞여 새로운 형태로 나왔다. 그렇다면 AI가 내 패턴을 학습해서 새로운 걸 만드는 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를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그 거장들의 작품을 보며 감동받았고, 그들을 존경했다. 내 작업에 그들의 영향이 있다는 걸 인정했고, 때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반면 AI는 그런 과정 없이 데이터를 흡수하고 재조합한다. 거기엔 존경도, 인정도, 감사도 없다.
최근 미국에서는 AI 회사들과 언론사, 작가들 사이의 소송이 늘어나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왕좌의 게임' 원작자도 자신들의 작품이 무단으로 AI 학습에 사용됐다며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AI가 만든 결과물이 원작과 얼마나 비슷해야 침해로 볼 것인지, 그 기준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얼마 전 소셜미디어에서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들이 인기를 끌었다. 모두가 자신만의 '지브리풍' 이미지를 만들어 올렸고, 그 결과물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정작 지브리 창립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AI 기술을 '삶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기에 이상한 모순이 있다. AI 기술 사용을 반대한 창작자의 스타일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AI에 의해 무한 복제되고 있는 것이다. 스타일 자체는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스타일 안에 담긴 창작자의 철학과 세계관까지 복제되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내가 설계한 건물 입면이 누군가의 AI에 학습되어, 나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비슷한 디자인을 만든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디자인이 나보다 더 많은 건축주들에게 선택받는다면? 그때 나의 정체성은, 건축가로서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분노가 이해된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평생의 철학과 고민이 담겨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전쟁의 참혹함, 성장의 아픔과 치유. 그런 깊은 메시지들이 단순히 시각적 스타일로만 소비되는 걸 보는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보면 모든 창작은 이미 있던 것들의 재배열이었다. 언어는 기존 단어들의 조합이고, 음악은 정해진 음계의 배치이며, 건축은 이미 있는 공간과 재료들의 조합이다. AI 시대도 마찬가지다. AI는 기존 데이터의 패턴을 학습해서 새로운 조합을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과정과 의도다. 인간이 기존 작품들을 참고할 때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있다. 선배 창작자들에 대한 인정과 예의가 있다. 반면 AI는 그런 감정 없이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한다. 거기엔 창작자에 대한 배려도, 윤리적 고려도 없다.
그렇다면 AI를 사용하는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 나는 이 문제가 법이나 제도로만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개인의 양심과 도덕성에 달린 문제다.
예를 들어, 내가 AI 도움을 받아 글을 쓸 때 그 사실을 밝혀야 할까? 법적으로는 의무가 아닐 수도 있지만, 독자에 대한 예의는 아닐까? 또는 AI를 사용해서 누군가의 스타일을 모방한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게 옳을까?
이런 질문들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질문은 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양심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법이 허용한다고 해서 모든 게 도덕적으로 옳은 건 아니니까.
요즘 유튜브나 틱톡에서는 '패스트 무비'가 유행이다. 두세 시간짜리 영화를 10분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콘텐츠다. 바쁜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겠지만, 원작 제작자들에게는 악몽 같은 일이다. 수년간의 노력과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 누군가의 10분짜리 요약 영상으로 소비되어 버린다.
일본에서는 이미 패스트 무비 제작자들에게 손해배상 판결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방송사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콘텐츠가 너무 쉽고 빠르게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하나를 막으면 열 개가 생기고, 열 개를 막으면 백 개가 생긴다.
여기에 AI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이제는 영상 편집도, 자막 생성도, 심지어 내레이션까지 AI가 할 수 있다. 원작자 허락 없이 콘텐츠를 가공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건축 분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몇 달에 걸쳐 완성한 설계안이 AI를 통해 몇 분 만에 변형되고 재생산된다. 물론 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핵심 아이디어나 공간 구성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나는 AI를 쓸 때마다 가끔 죄책감을 느낀다. 이게 정당한 도구 사용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노력을 착취하는 일일까? 특히 그 건축 패턴 영상을 본 후로는 더욱 그렇다. 내 작업이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나는 AI의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게 우리 시대의 딜레마인 것 같다. 기술의 편리함과 창작자에 대한 예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 법적 허용과 도덕적 올바름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
나는 점점 확신한다. 이 문제의 해답은 제도나 법보다는 개인의 양심에 있다는 걸. 법이 모든 걸 규제할 수는 없고,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도 없다. 결국 각자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 한다. "이게 옳은 일인가? 내가 다른 창작자 입장이라면 어떻게 느낄까?"
물론 쉽지 않다. 편리함을 포기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게 창작자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책임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계속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과연 나는 AI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다른 창작자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가? AI 도움을 받는다면, 그에 맞는 대가나 인정을 하고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급한 마음에 AI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때로는 AI가 만든 아이디어를 내 것인 양 사용했을 때도 있었다. 그 순간들을 떠올리니 부끄럽다.
하지만 이런 반성이 중요한 것 같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결국 이 대부분 문제의 핵심은 양심이다. 법이나 제도가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각자의 양심뿐이다. 다른 창작자들을 존중하는 마음, 그들의 노력을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려는 의지. 그게 바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나는 오늘부터라도 더 신중해지려고 한다. AI를 사용할 때는 그 사실을 밝히고, 다른 창작자들의 작품을 참고할 때는 출처를 밝히고, 무엇보다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이게 옳은 일인가?"
그게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창작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인 것 같다. 법보다 앞서는 양심, 제도보다 먼저 작동하는 도덕성. 그게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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