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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깊은 밤, 변해버린 거대한 강을 앞에 두고... (AI시대의 중년)

architect-v 2025. 6. 7. 16:27

사무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바깥 풍경이 자꾸만 멀어진다.

회색빛 탑처럼 늘 서 있던 빌딩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이를 가르는 바람. 이 풍경을 바라보는 내가 언젠가부터 투명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오늘 처음 이 자리에 앉은 것 같기도 하다.

20년 가까이 다닌 대기업의 명함을 책상 위에 놓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과연 내 인생의 전부일까. 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나 역시 삶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AI가 점령해가는 세상, 그 변화의 속도가 무섭다.

아침마다 쏟아지는 기사들이 이제 익숙하다. 어제는 챗GPT가 변호사 시험을 통과했다는 이야기, 오늘은 AI가 사람을 대신해 의료 진단을 내린다는 소식. "AI 시대, 대기업 중간관리직 10년 내 30% 감축 전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읽었다. 국내 주요 직업의 절반 이상이 AI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통계청 자료에서는 현재 존재하는 직업의 47%가 20년 내에 자동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내가 해오던 일 중 일부는 이미 자동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런 숫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깨닫는다. 내가 느끼는 이 불안감은 단순한 개인적 고민이 아니라, 우리 세대 전체가 마주한 시대적 과제라는 것을. 내가 하는 업무 중 상당 부분이 AI로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마흔이 넘으니, 안정이란 단어가 점점 무거워진다.

대기업이라는 조직은 분명 매력적인 곳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 안정감이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되기도 한다.

아들의 웃음소리와 아내의 따스한 손길, 적당한 월급과 집 한 채, 이 모든 것이 나를 붙잡고 있는 동시에, 내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벽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대기업이면 됐다고 말한다. 그래도 불안하다.

10년 후 정년퇴직을 맞았을 때, 나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사회의 변화에 뒤처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 상상이 나를 가장 두렵게 한다. 정년까지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그 이후의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아무 답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람인이 직장인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봤다. 응답자의 60% 이상이 '이직 또는 창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그 이유로는 '성장 기회'와 '새로운 경험'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N잡러', '사이드 프로젝트', '퇴사학교'와 같은 키워드들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개인적인 불안을 넘어선 일종의 사회 현상임을 깨닫는다.

물론, 이러한 도전이 항상 성공적인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도 잘 알고 있다. 마치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기대만큼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은, 단순히 돈벌이를 넘어선 무언가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식탁에서 아들이 묻는다.

"아빠, 50대 되고나면, 나중에 뭐 하고 싶어?" 한순간 말문이 막힌다. 아이에게 안정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도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아들이 숙제를 하며 "아빠는 왜 매일 늦게 와?"라고 묻던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아빠가 열심히 일해야 너를 키울 수 있어"라고 답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안정된 직장에서 받는 월급일까, 아니면 변화하는 세상에 맞서는 용기와 도전 정신일까.

내가 미처 가지 못한 길을, 아이가 두렵지 않게 걸어가길 바란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내가 머무는 이곳이 정말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자꾸만 묻는다. 지금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미래의 나는 시대에 너무 뒤쳐져 아들에게 아무런 비전도 제시해 줄 수 없는 무력한 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요즘은 퇴근 후 작은 시도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다. 가족에 대한 책임이 있고, 현실적인 제약들이 있다. 하지만 준비는 할 수 있다. 최근 '사이드 허슬(Side Hustle)' 트렌드가 주목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본업을 유지하면서 부업이나 개인 사업을 병행하는 것이다.

온라인 강의도 들어보고, 관심 있던 분야의 책도 읽는다. 블로그에 글을 써보고, 사이드 프로젝트도 구상해 본다. 큰 수입을 바라는 건 아니다. 세상이 얼마나 변하고 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 작은 움직임이라도 멈추지 않는다.

변화는 거창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매일 조금씩,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네트워킹을 넓히고, 온라인 강의 하나를 듣는 것, 관련 서적 한 권을 읽는 것,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이런 작은 행동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고 믿는다.

 

불안과 용기, 그 사이에 머문다.

도전의 본질은 '불확실성'이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작은 가능성을 찾고 싶다. 완벽한 준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용기다.

한편으론 두렵다. 변화를 택하는 순간, 안정이란 이름의 울타리를 떠나게 될까 봐.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10년 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이 두려움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도전해서 실패하는 것과 도전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견딜 수 있을까. 실패는 경험이 되지만, 하지 않은 도전은 영원한 의문으로 남는다는 것을 안다.

 

아이에게, 그리고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포기하지 않는 어른의 얼굴이다.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면, 그녀의 인물들이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기만의 길을 걷는 모습에 감동받는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인생의 한가운데서, 두려움과 불안을 인정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 그것이 중년의 용기 아닐까.

실패해도 괜찮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기꺼이 변화의 강을 건너겠다고 말해주는 어른.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다짐한다.

 

강은 흐른다. 나는 오늘도 그 강가에 서 있다.

저마다의 강이 흐른다. 그 강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고, 우리는 그 강을 건너간다.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두렵지만, 그 강을 건너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인생일 것이다.

완벽한 다리는 없다. 징검다리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밟아본다. 언젠가는 저 너머에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오늘도 조용히, 내 마음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오늘 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안전지대를 벗어날 용기를 갖자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그리고 아이에게 도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이것이 바로 우리 세대가 마주한 숙제이자, 기회가 아닐까.